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 (문단 편집) == 역사 == 기원전에 원주민 [[아라와크]]족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페인인]]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는 [[무인도]]였다. 제도의 발견은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발견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1512년의 [[후안 폰세 데 레온]]이 발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스페인은 이 섬을 [[프랑스]]에 팔았고 시간이 흘러 영국으로 건너와 있었는데 스페인 선박을 습격하기 위한 해적 소굴로 이용한 것 이외에는 거의 무인도 상태였다. 1681년 버뮤다에서 소금 채취를 하던 영국인들이 채굴이 쉬운 그랜드 터크 섬에 정착하게 되면서 영국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1780년대에는 미국인들이 노예를 데리고 면화 재배를 시작했지만 태풍 피해로 1820년에 동행하고 있던 노예를 두고 떠나버렸다. 남겨진 노예는 고기를 채집해 생활했고 현재 대부분의 섬 주민들은 그들의 후손이다. 이후로도 버뮤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금 채취를 위해 계절적으로 그랜드 터크 섬과 버뮤다 본섬을 왕래했고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는 문화적으로 바하마보다는 버뮤다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706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를 점령했을 때 그들과 전투를 벌여 몰아낸 것도 버뮤다 군대로, 이는 영국 속령이 본토의 판단 없이 독자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유일한 사례이다. 그러나 바하마 자치 정부는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본인들이 이 제도의 관리를 맡고 싶었고 이에 버뮤다와 바하마는 18세기 내내 이 제도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였다. 같은 영국 왕관 아래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게다가 식민지 주제에 그 밑에 또 식민지를 거느리려는(...) 골때리는 상황에 영국 정부는 골머리를 앓았다. 1799년 바하마가 이 지역을 합병하고 세금을 걷자 버뮤다는 이에 반발했으나, 1815년 [[미영전쟁]] 이후로 터크스 섬 소금의 최대 수입처였던 미국이 영국과의 관계 악화로 소금을 사지 않게 되자 가치가 없어진 이 섬을 비로소 포기했다. 그러나 바하마와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의 문화적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자메이카]]의 관리 아래로 옮겨졌다. 1917년에는 [[캐나다 자치령]]이 합병을 제안했으나 당시 영국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거부했다. 1962년 자메이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혼자 영국 직할령이 되었고 1965년 다시 바하마에 편입되었으나 1973년 바하마의 독립으로 두 제도는 분리되어 [[총독]]을 두게 되었다. 1982년 독립 결정이 나왔지만 이후 취소되고 현재는 영국령이다. 마이클 미식(Michael Misick) 총리의 부정 축재 의혹으로 2009년 3월 영국 총리의 조언에 따라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추밀원령을 발동해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의 헌법 중 자치 정부에 대한 조항을 잠정적으로 중지하고 영국 본국에서 파견된 총독의 직접 통치를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미식 총리 사임 후임으로는 야당의 애니아 윌리엄스가 거론되었으나 8월에 추밀원령이 발효되면서 총독의 직접 통치 체제가 출범했다. 2012년 11월 9일 의회 선거 후 자치 제도를 회복했다. 2021년 6월 28일에 시신 20구(!)를 실은 선박이 인근 해역에서 발견됐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9/0002683656?sid=1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